주민이 참여한 “추모제”를 처음 개최
재한피폭자들의 새로운 투쟁

 86일 한국 합천(陜川)에서 피폭2세들이 대규모 ‘추모제’ 를 열었다. 의료비 전액 지급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하는 등, 재한 피폭자들의 새로운 투쟁이 시작되었다.

                                                                                                  이토 타카시(伊藤孝司)

비가 그치자마자 매미가 일제히 울어댄다. 그 소리를 마치 신호로 하듯이 “위령각(慰靈閣) 앞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그 전통적인 건물 안에 위패가 빈틈없이 늘어서고 있다.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 피폭하고 돌아가신 한국인들1)의 위패다.

여기는 한국 경상남도 합천군에 있는 “원폭피해자복지회관”.2)  합천에는 아직도 약 600명의 피폭자가 살고 있다. ‘한국의 히로시마’라고 불린다.

피폭자와 관계자 등 약 300명이 지키는 가운데, 돌아가신 피폭자를 애도하는 제사부터 ‘추모제’는 시작되었다. 작년까지는 추도식전 행사만 열렸지만 올해는 피폭2세들이 운영하는 ‘합천 평화의집’이 중심이 되어 지역주민들이 참여하는 방식으로 개최되었다.

까다로운 ‘수첩’ 취득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 피폭되어, 남북조선과 브라질, 미국 등 해외에서 생활하는 피폭자는 약 4300. 그들 재외피폭자는 일본정부에 일본에서 사는 피폭자와 동일한 원호(援護)조치를 요구하여 오랫동안 싸워왔다. 그 결과 2008년에 일본 재외공관(在外公館)에서 ‘피폭자 건강수첩’ 신청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아직 일본 피폭자들보다 불리(不利)한 취급을 받고 있다.

표차순씨(19323월생) 댁을 찾아갔다. 히로시마시 칸논죠에서 가족과 함께 살았고, 아버지는 토목 일에 종사하고 있었다. 집에서 부모들과 함께 피폭. 귀국했다.

“수첩이 교부될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부모님들이 돌아가신 후였고, 피폭 당시의 기억이 나에게는 없습니다. 당시 학교를 다녔던 것을 증명할 수는 있지만, 이웃들과의 교류가 없어서 피폭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수첩 취득에는 제3자 증인 2, 아니면 공적 증명서가 필요하다. 그러나 일본 국외에서 사는 피폭자가 그 조건을 갖추기는 꽤 어렵다. 일본 정부는 장기간에 걸쳐 재외 피폭자를 원호(援護) 대상에서 제외해 왔다. 고생 끝에 수첩을 취득해도 종잇조각에 불과했다. 수첩만 있으면 자국 내에서도 수당수급이 가능해진 것은 2003. 그러나 이미 증인이나 증거를 찾기가 불가능해진 사람들이 많았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의 심진태 전() 합천지부장은 ‘협회에 등록한 피폭자 2,650명 중 수첩교부를 받지 못 하는 사람이 약 130명 있습니다. 합천만 해도 90명입니다. 일본정부의 수첩 교부조건은 잘 못 했습니다’ 고 분개한다. 수첩 취득이 어려워진 것은 일본정부가 재외피폭자를 무시하는 정책을 펼쳐 왔기 때문이다. 통원치료를 지속적으로 받고 있는 표차순씨는 수첩 교부심사기준 완화를 간절히 요구하고 있다.

의료비 전액지급을!!

재외피폭자는 수첩을 취득해도 일본 피폭자와 똑같은 취급을 받지 못하고 있다. ‘피폭자 지원법’에는 피폭자의 의료비는 정부가 전액 부담한다고 규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재외피폭자에게는 상한액을 규정하고 있다. ‘재외피폭자 보험의료 조성사업’에 근거하여 2004년부터 의료비 지급이 실시되어, 현재는 1년에 172000(연속4일 이상 입원한 경우는 18 3000)이 지급된다. 그 액수를 넘을 경우는 개인부담이 된다.

배득경씨(19452월생)는 합천에 있는 아파트에서 산다. 히로시마시 후나이리죠에서 일가 6명이 피폭해 모두가 수첩을 취득.

14세 때부터 병원이 다니기 시작했고, 지금은 뇌졸중, 중풍, 당뇨병 등 때문에 약을 많이 먹고 있습니다. 한약도 먹고 있습니다. 약값에 한 달에 43만원(3만엔) 가까이 되기 때문에 연간 500만원(35만엔)정도가 되어, 상한액을 크게 초과합니다. 똑같이 피폭했는데 일본정부는 왜 차별하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이홍현씨(19461월생)은 태내(胎內)피폭자. 어머니와 형, 누나는 히로시마시 후쿠시마죠에 있던 집에서 피폭. 폭풍으로 집이 무너지면서 어머니와 누나는 머리에 상처를 입었다. 아버지는 미쯔비시중공업에 일하러 하는 중에 피폭. 일가가 한국으로 귀국한 후 이홍현씨는 태어났다.

“저는 태어났을 때부터 건강상태가 안 좋아서 어머니는 제가 곧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홍현씨는 2002년에 수첩을 취득. 현재 만성신부전 때문에 인공투석을 계속 받고 있고, 자기부담은 매월 약 13만원 (9000)에 이루다. “수입이 없는 저에게는 의료비는 큰 부담이 되어 마음이 무겁습니다. 일본정부는 전액 지급해야 합니다.”고 말한다.

올해 1, 이홍현씨 등 3명의 피폭자들은 과거 5년간 자기부담한 의료비 1659만원(117만엔)지급을 오사카 신청. 그것이 각하되면서, 의료비가 전액 지급되지 않는 것은 부당하다고 61일에 오사카 지방재판소에 제소했다.

일본정부는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피해를 입은 외국인에 대한 보상이나 원호조치를 취해 오지 않았다. 재외피폭자는 그것에 대해 30회 이상의 소송을 제기해 왔다. 그리고 재판 승호를 통해 일본 피폭자와의 격차를 하나씩 철폐시켜 왔다. 일본정부는 ‘피폭자는 어디에서도 피폭자’라는 시점에서 일본 피폭자와 동일한 원호조치를 모둔 재외피폭자3)에게 조속히 취해야 할 것이다.            


1) 히로시마에서 5만명, 나가카시에서 2만명의 조선인이 피폭. 그 중 귀국한 한국인은 히로시마에서 15000, 나가사키에서 8000. 조선반도 남쪽으로는 약2만명, 북쪽으로는 약 3000명으로 추정된다.

2) 일본정부가 보상 대신 피폭자들에게 지불한 40억엔의 일부를 이용해, 1996년에 완공. 정원 110명의 68%는 합천 주민들이고 평균 연령은 78. “주간 금요일” 1997 8 1일 호 졸고(拙稿) “원폭기민 재한피폭자에 지불된 40억엔은 어떻게 이용되었는가”를 참조.

3) 일본정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피폭자에게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이토 타카시

포토 저널리스트. 영화 “히로시마 평양”을 감독. 저서에 “원폭기민” “지구를 죽이지 말아” 등 다수. 홈페이지는  http://www.jca.apc.org/~earth/